녹우단 뒷산 비자림에 들면… 눈과 귀로 ‘초록비’를 만난다. ‘해남’의 숨겨진 명소들
외지인들에게 ‘해남 땅에서 가장 이름난 곳’을 묻는다면 너나없이 ‘땅 끝’을 말한다. 땅끝마을의 유명세로 해남군이 땅끝의 행정지명을 해남군 송지면 갈두리에서 아예 ‘땅끝리’로 바꾸었을 정도다. 그러나 풍경만으로 치자면, 땅끝에는 이렇다 할 게 없다. 그럼에도 땅끝이 사람들을 모으는 것은, 한반도 땅의 최남단이라는 장엄하고 엄숙한 의미 때문이다. 늘 느끼는 것이지만, 이렇듯 압도적인 명성을 지닌 것들은 주변의 다른 빼어난 명소를 가린다. 사실 해남은 땅끝이란 의미 말고도, 다양한 풍경의 스펙트럼을 갖고 있다. 해남에는 기암괴석으로 이뤄진 기기묘묘한 산세의 달마산과 넉넉하게 솟아 남녘의 산들을 굽어보고 있는 두륜산이 있다. 그리고 그 산에 깃든 절집 대흥사와 미황사도 있고, 암봉 끝에 매달린 도솔암의 빼어난 정취도 있다. 또 진도로 건너가는 좁은 목에는 이순신의 명량해전의 현장인 울돌목이 있고, 녹우당에는 고산 윤선도의 자취가 남아 있다. 부릅뜬 눈에다 수염 한 가닥까지도 생생한 자화상을 남긴 윤두서가 살았던 고택도 바로 이곳 해남에 있다.
달마산 남쪽 자락에서 허공에 뜬 도솔암을 만나다
해남군 송지면 일대가 ‘땅 끝’이라면, 땅 끝을 내려다보며 솟아 있는 한반도 땅끝 지맥의 마지막 산인 해남의 달마산은 ‘산 끝’이라고 불러도 괜찮겠다. 산 능선을 따라 불쑥불쑥 솟은 달마산의 암봉은 설악이나 금강의 그것에 비교해도 모자람이 없다. 임진왜란 때 왜군들마저도 달마산의 기묘한 암봉을 보고는 불심을 모아 합장을 했다던가.
달마산의 암봉 중에서도 아름답기로 손꼽는 봉우리가 도솔봉이다. 마련마을을 지나 달마산 남쪽 사면 통신탑 쪽으로 난 시멘트 포장길로 9부 능선까지 차를 타고 오른다. 여기서 산 어깨를 도는 짙은 숲길을 따라 30분쯤 오르내리면 바위 암봉 사이에는 손바닥만 한 터를 잡아 지은 도솔암을 만난다. 어찌 저렇듯 아슬아슬한 벼랑에 암자를 올렸을까.
돌계단을 밟아 도솔암의 손바닥만 한 마당에 올랐다. 남해바다가 멀리 화첩을 펴듯 주르륵 펼쳐지고, 이제 막 노랗게 물들어가는 논들이 융단처럼 발아래로 깔린다. 도솔암의 연원을 따지자면 통일신라 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의상대사가 세운 도솔암은 조선조 정유재란 때 패퇴한 왜군들이 해상퇴로가 막히자 달마산으로 퇴각하면서 불을 질러 폐사됐단다. 그리곤 빈터와 주춧돌만 남긴 채 수백 년이 지났고, 2002년 오대산 월정사의 법조 스님과 불자들이 흙기와와 자재를 져날라 불과 32일 만에 단청까지 마친 법당을 지어냈단다.
도솔암에 오르자면 앞서 달마산 아래의 미황사를 거쳐야 하는 것이 순서겠다. 단청이 다 지워져 화장기 없는 말간 모습을 한 미황사는 하늘이 넓은 절집이다. 대웅전으로 오르는 돌계단 앞에 서면 시야에 드는 것은 온통 하늘뿐이다. 계단을 하나씩 밟아 오르면 석축 사이로 대웅전 지붕부터 처마 기둥까지 천천히 모습을 드러낸다. 이렇듯 미황사가 수면 위로 떠오르는 듯한 모습이라면, 반대로 도솔암은 드넓은 땅과 바다를 내려다보면서 천길 허공에 아슬아슬 걸린 모습이다. 그러고 보니, 산 아래 절집과 산위의 암자가 이렇듯 서로 짝을 이루고 있다.
울돌목에서 ‘바다가 우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썰물에 맞춰 울돌목을 찾아간 것은 ‘보기’ 위한 것이 아니라 ‘듣기’ 위함이었다. 언젠가 명량대첩 축제의 공연을 맡았던 한 극단의 대표가 대뜸 “진도대교 아래 울돌목에서 바다가 우는 소리를 들어보라”고 권했다. 그 역시 축제를 준비하면서 소용돌이치는 울돌목의 물소리를 처음 들었다는데, 어찌나 소리가 크고 깊은지 정신이 아찔해질 정도라고 했다.
1597년 9월 16일. 울돌목에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이끌던 수병과 의병들은 단 12척의 배로 왜선 133척을 수장시켰다. 이른바 명량대첩이다. 이 전투가 감격적인 것은 세계해전사상 유례가 없다는 승전 규모보다는, 감옥에서 풀려난 이순신 장군이 다시 삼도수군절도사가 돼 원균이 버려둔 폐선을 몰고 거둔 승리라는 것이 더 감격적이다. 이 승전으로 이순신은 왜구들로부터 호남 땅을 지켰고, 그 승전을 증거하는 울돌목의 물살은 지금도 여전히 우당탕 흘러가고 있다.
물때를 겨누다가 오후 썰물 때에 맞춰 울돌목을 찾았다. 해남에서 진도대교를 건너기 직전 샛길로 들어 대형 횟집 주차장에 차를 대놓고 물가로 내려섰다. 썰물의 조류를 따라 물살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빠르게 흘렀다. 거센 물살이 소용돌이쳤다. 조류에 휘감긴 물은 마치 분수처럼 용솟음치기도 했다. 흰 포말이 성난 이빨처럼 날카롭게 수면 위로 솟았다. 물은 으르렁거리며 울었고, 아찔한 현기증과 함께 맥박이 빨라졌다. 아, 이래서 바다가 우는 소리, 즉 ‘명량(鳴梁)’이란 이름을 얻었겠구나. 울돌목 곳곳에는 해신(海神)을 믿으며 굿을 하거나 기도를 한 무속인들의 흔적들이 남아 있다. 바다가 가진 가늠할 수 없는 힘과 기운을 느끼기에 이곳만 한 데가 없는 탓이리라.
녹우단의 비자나무숲에 들어 초록의 빗소리를 듣다
녹우당과 녹우단. 해남 윤씨 종가를 찾아가는 길의 이정표는 저마다 달랐다. 어느 곳에는 녹우당이라고 적어놓았고, 다른 이정표에는 녹우단이라는 이름이 뚜렷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고산 윤선도가 기거하던 사랑채가 녹우당이고, 녹우당을 포함한 해남 윤씨 종택은 녹우단이라 불린다. 그렇다면 ‘녹우(綠雨)’란 무슨 뜻일까. 녹우단이 들어선 뒷산의 비자나무숲이 바람에 흔들리면 마치 비가 내리는 소리를 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녹우당으로 드는 입구의 500년 된 은행나무의 잎은 벌써부터 노란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솟을대문을 삐꺽 열고 들어선 녹우당은 가을볕을 받아 환하게 빛났다. 녹우당은 효종이 윤선도에게 하사해 수원에 지었던 것인데, 윤선도가 82세 되던 해에 집을 뜯어 배에 싣고 이곳으로 옮겼다고 전해진다. 녹우당은 특이하게도 서쪽을 향해 앉아 있다. 건물 바깥쪽의 긴 지붕의 회랑도 오후의 따가운 볕이 툇마루까지 드는 것을 막기 위해 달아놓은 것이다.
녹우당 마당의 잔디밭 위에는 ‘기(氣)가 나오는 자리’라는 팻말이 서 있다. 그러나 기를 받고자 한다면, 그곳보다는 녹우단 뒤편의 비자림에 들어야 할 듯싶다. 녹우단 뒤편 비자나무숲은 탄성이 터질 정도로 초록빛이 빽빽하다. 해남 윤씨의 선조가 “뒷산의 바위가 드러나면 마을이 가난해진다”고 해서 후손들이 정성으로 숲을 가꾼 탓이다. 점입가경. 비자나무숲은 깊이 들수록 더 짙어진다. 바람이 나무 사이로 불면 ‘녹우’라는 이름답게 빗소리가 들릴 듯하다. 비자나무 숲길에서 만난 한 중년 부부는 들뜬 표정으로 “녹우단을 찾았다가 이 숲에 들지 않고 발길을 돌리려거든, 차라리 안 오느니만 못하겠다”고 했다. 그 숲길에 발을 들여보았다면 누구든 동감을 표시했으리라.
윤두서 고택을 찾아 조선시대쯤으로 되돌아가다
해남에는 고산 윤선도의 증손자인 공재 윤두서의 고택도 있다. 조선 후기의 선비화가로 시와 글·그림에 두루 능했던 그는 학문과 사상은 조선 후기 실학사상의 뿌리를 내린 것으로 평가되는데, 윤두서가 남긴 자화상에서 들여다볼 수 있는 사실주의 화풍에서도 그 정신이 또렷이 드러난다. 녹우단이 보관하고 있다는 자화상 속의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의 윤두서의 모습은 보는 이들을 압도하고도 남음이 있다.
윤두서의 고택은 해남군 현산면 백포마을에 있다. 백포마을은 오래된 한옥들이 처마를 맞대고 있고, 최근에 보수한 돌담들도 운치 있게 이어져 있었다. 한때 48칸짜리였다던 고택은 이제 안채 13칸과 곳간채 3칸, 사당, 헛간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남아 있는 고택의 규모는 크거나 웅장한 느낌은 아니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기품이 흘렀다. 아무도 살지 않는 탓인지 집은 쇠락했으나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조선시대쯤으로 되돌아간 것 같은 느낌이다. 고택도 고택이지만, 차분하면서도 고즈넉한 마을의 느낌만으로도 이곳을 찾은 보람이 있었다.
사실 구태여 윤두서의 고택을 물어물어 찾아간 까닭은, 미황사의 처사로부터 명부전의 10대 시왕 조각이 “공재 윤두서의 솜씨”라는 말을 듣고서였다. 아들이 없던 윤두서는 절 근처의 은행나무를 베어다가 미황사 명부전에 10대 시왕을 조성하고 신기하게도 10명의 아들을 보았다고 전해진다. 더욱 신기한 일은 10대 시왕 중 네 번째 시왕의 눈의 크기가 실수로 다르게 조각됐는데, 윤두서의 넷째아들도 눈의 크기가 달랐다던가.
해남 땅에 넘쳐나는 이야기와 볼 것들
해남에 들어설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해남에서는 지도를 펴들면 도무지 어디로 가야 할지 마음을 정할 수 없다. 곳곳에서 이야기로 가득한 명소들이 유혹하는 탓이다. 케이블카를 타고 두륜산에 올라 서북쪽으로는 남도의 이름난 산들이 죄다 발아래다.
두륜산 자락의 대흥사는 또 어떤가. 대흥사 숲길을 걸어 들어가 유선여관에 여장을 내려놓고 옛 여관의 고즈넉한 저녁을 즐겨도 좋겠고, 곧바로 대흥사 부도전에서 아름다운 꽃 문양과 원숭이 문양의 부도를 들여다봐도 좋겠다. 대흥사 산문에 들어 대웅보전에 걸린 당대의 명필로 꼽혔던 원교 이광사의 글씨며 추사 김정희, 그리고 안평대군의 현판 글씨를 하나하나 짚어가며 비교해보거나, 내친김에 일지암까지 올라 초의선사가 차를 달일 때 썼다던 돌확도 어루만져 보면 어떨까.
언제 가 봐도 가슴이 뜨거워지는 땅끝이야 해남 땅에서는 필수코스겠고, 고산 윤선도의 자취를 따라 땅끝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노화도를 딛고 완도의 보길도로 건너가 부용동 정원을 돌아보며 “지국총 지국총 어사화……”로 이어지는 윤선도의 ‘어부사시사’를 읊어보거나, 예송리 갯돌들이 도르르 구르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보면 어떨까.
여기다가 화원반도 서쪽 끝에 등불을 켠 목포구(木浦口)등대는 이름 그대로 목포의 입구에 우뚝 서서 화물선이며 어선들이 드나드는 해협을 100년째 밝히고 있다. 이뿐이랴 우항리의 공룡화석지에서는 풍화되지 않은 지층에서 찾아낸, 이 땅에서 가장 선명한 수억 년 전의 공룡발자국도 볼 수 있다. 해남 땅은 멀지만, 이렇듯 도처에 명소고, 도처에 묵은 이야기들이 있다. 해남 땅에서 만나는 풍경은 죄다 크고, 깊고, 또 유장한 맛이 넘친다. 소리로 치자면 가야금이나 징소리에 가깝다. 절집의 현판, 바다의 물굽이, 고택의 고즈넉한 풍경에도 다 깊은 이야기가 스며 있다. 그 이야기들은, 신발에 묵직하게 달라붙는 남도 땅의 붉은 황토처럼 돌아오는 길에도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Tip
해남 가는 길
땅끝이란 이름답게 해남은 멀다. 서해안고속도로로 종점인 목포까지 가서 다시 영암방조제를 지나 806번 지방도로를 따라가면 해남이다. 목포에서 아예 2번국도로 강진 방향으로 향하다가 13번 국도로 갈아타고 가는 방법도 있다. 목포에서 해남까지는 50분 안팎이 소요된다. 해남은 땅이 워낙 넓은데다 명소들 간의 거리도 멀다. 예컨대 미황사에서 땅끝마을까지 거리가 40km에 이르고, 울돌목까지는 63km에 달한다. 동선을 잘 짜서 움직여야 시간낭비가 없다. 이동시간도 넉넉히 계산해야 한다.
어디서 묵고 무엇을 맛볼까
땅끝마을 일대에 모텔급 숙소들이 즐비하다. 호텔과 콘도도 있지만 대부분 시설이 낡은 편이라 이름값을 못한다. 최근에 지어진 땅끝마을하얀집(061-534-3223)이 깔끔한 편이다. 해남읍에도 해남관광호텔(061-533-1222)이 있다. 대흥사 쪽이라면 한옥여관으로 유명세를 타고 있는 유선여관(061-534-3692)이 추천할 만하다. 해남을 방문한 여행자들이 순례지처럼 들르는 곳이 읍내의 ‘천일식당(061-535-1001)’이다. 떡갈비와 한정식을 내놓는다. 명성은 예전만 못하지만, 그래도 떡갈비 하나는 최고로 치는 곳이다. 땅끝마을의 ‘땅끝바다회집(061-534-6642)’은 전복이 곁들여진 생선회를 내놓는데 음식이 깔끔하다. 목포를 거쳐서 해남으로 든다면 목포의 청자식당에 들러 끝물인 민어회 맛을 봐도 좋겠다. 한때 민어회라면 ‘영란식당’을 최고로 쳤지만, 이즈음 현지인들은 ‘청자식당’의 민어를 더 쳐준다.
글·사진 / 박경일 (문화일보 기자)
외지인들에게 ‘해남 땅에서 가장 이름난 곳’을 묻는다면 너나없이 ‘땅 끝’을 말한다. 땅끝마을의 유명세로 해남군이 땅끝의 행정지명을 해남군 송지면 갈두리에서 아예 ‘땅끝리’로 바꾸었을 정도다. 그러나 풍경만으로 치자면, 땅끝에는 이렇다 할 게 없다. 그럼에도 땅끝이 사람들을 모으는 것은, 한반도 땅의 최남단이라는 장엄하고 엄숙한 의미 때문이다. 늘 느끼는 것이지만, 이렇듯 압도적인 명성을 지닌 것들은 주변의 다른 빼어난 명소를 가린다. 사실 해남은 땅끝이란 의미 말고도, 다양한 풍경의 스펙트럼을 갖고 있다. 해남에는 기암괴석으로 이뤄진 기기묘묘한 산세의 달마산과 넉넉하게 솟아 남녘의 산들을 굽어보고 있는 두륜산이 있다. 그리고 그 산에 깃든 절집 대흥사와 미황사도 있고, 암봉 끝에 매달린 도솔암의 빼어난 정취도 있다. 또 진도로 건너가는 좁은 목에는 이순신의 명량해전의 현장인 울돌목이 있고, 녹우당에는 고산 윤선도의 자취가 남아 있다. 부릅뜬 눈에다 수염 한 가닥까지도 생생한 자화상을 남긴 윤두서가 살았던 고택도 바로 이곳 해남에 있다.
달마산 남쪽 자락에서 허공에 뜬 도솔암을 만나다
해남군 송지면 일대가 ‘땅 끝’이라면, 땅 끝을 내려다보며 솟아 있는 한반도 땅끝 지맥의 마지막 산인 해남의 달마산은 ‘산 끝’이라고 불러도 괜찮겠다. 산 능선을 따라 불쑥불쑥 솟은 달마산의 암봉은 설악이나 금강의 그것에 비교해도 모자람이 없다. 임진왜란 때 왜군들마저도 달마산의 기묘한 암봉을 보고는 불심을 모아 합장을 했다던가.
달마산의 암봉 중에서도 아름답기로 손꼽는 봉우리가 도솔봉이다. 마련마을을 지나 달마산 남쪽 사면 통신탑 쪽으로 난 시멘트 포장길로 9부 능선까지 차를 타고 오른다. 여기서 산 어깨를 도는 짙은 숲길을 따라 30분쯤 오르내리면 바위 암봉 사이에는 손바닥만 한 터를 잡아 지은 도솔암을 만난다. 어찌 저렇듯 아슬아슬한 벼랑에 암자를 올렸을까.
돌계단을 밟아 도솔암의 손바닥만 한 마당에 올랐다. 남해바다가 멀리 화첩을 펴듯 주르륵 펼쳐지고, 이제 막 노랗게 물들어가는 논들이 융단처럼 발아래로 깔린다. 도솔암의 연원을 따지자면 통일신라 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의상대사가 세운 도솔암은 조선조 정유재란 때 패퇴한 왜군들이 해상퇴로가 막히자 달마산으로 퇴각하면서 불을 질러 폐사됐단다. 그리곤 빈터와 주춧돌만 남긴 채 수백 년이 지났고, 2002년 오대산 월정사의 법조 스님과 불자들이 흙기와와 자재를 져날라 불과 32일 만에 단청까지 마친 법당을 지어냈단다.
도솔암에 오르자면 앞서 달마산 아래의 미황사를 거쳐야 하는 것이 순서겠다. 단청이 다 지워져 화장기 없는 말간 모습을 한 미황사는 하늘이 넓은 절집이다. 대웅전으로 오르는 돌계단 앞에 서면 시야에 드는 것은 온통 하늘뿐이다. 계단을 하나씩 밟아 오르면 석축 사이로 대웅전 지붕부터 처마 기둥까지 천천히 모습을 드러낸다. 이렇듯 미황사가 수면 위로 떠오르는 듯한 모습이라면, 반대로 도솔암은 드넓은 땅과 바다를 내려다보면서 천길 허공에 아슬아슬 걸린 모습이다. 그러고 보니, 산 아래 절집과 산위의 암자가 이렇듯 서로 짝을 이루고 있다.
울돌목에서 ‘바다가 우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썰물에 맞춰 울돌목을 찾아간 것은 ‘보기’ 위한 것이 아니라 ‘듣기’ 위함이었다. 언젠가 명량대첩 축제의 공연을 맡았던 한 극단의 대표가 대뜸 “진도대교 아래 울돌목에서 바다가 우는 소리를 들어보라”고 권했다. 그 역시 축제를 준비하면서 소용돌이치는 울돌목의 물소리를 처음 들었다는데, 어찌나 소리가 크고 깊은지 정신이 아찔해질 정도라고 했다.
1597년 9월 16일. 울돌목에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이끌던 수병과 의병들은 단 12척의 배로 왜선 133척을 수장시켰다. 이른바 명량대첩이다. 이 전투가 감격적인 것은 세계해전사상 유례가 없다는 승전 규모보다는, 감옥에서 풀려난 이순신 장군이 다시 삼도수군절도사가 돼 원균이 버려둔 폐선을 몰고 거둔 승리라는 것이 더 감격적이다. 이 승전으로 이순신은 왜구들로부터 호남 땅을 지켰고, 그 승전을 증거하는 울돌목의 물살은 지금도 여전히 우당탕 흘러가고 있다.
물때를 겨누다가 오후 썰물 때에 맞춰 울돌목을 찾았다. 해남에서 진도대교를 건너기 직전 샛길로 들어 대형 횟집 주차장에 차를 대놓고 물가로 내려섰다. 썰물의 조류를 따라 물살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빠르게 흘렀다. 거센 물살이 소용돌이쳤다. 조류에 휘감긴 물은 마치 분수처럼 용솟음치기도 했다. 흰 포말이 성난 이빨처럼 날카롭게 수면 위로 솟았다. 물은 으르렁거리며 울었고, 아찔한 현기증과 함께 맥박이 빨라졌다. 아, 이래서 바다가 우는 소리, 즉 ‘명량(鳴梁)’이란 이름을 얻었겠구나. 울돌목 곳곳에는 해신(海神)을 믿으며 굿을 하거나 기도를 한 무속인들의 흔적들이 남아 있다. 바다가 가진 가늠할 수 없는 힘과 기운을 느끼기에 이곳만 한 데가 없는 탓이리라.
녹우단의 비자나무숲에 들어 초록의 빗소리를 듣다
녹우당과 녹우단. 해남 윤씨 종가를 찾아가는 길의 이정표는 저마다 달랐다. 어느 곳에는 녹우당이라고 적어놓았고, 다른 이정표에는 녹우단이라는 이름이 뚜렷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고산 윤선도가 기거하던 사랑채가 녹우당이고, 녹우당을 포함한 해남 윤씨 종택은 녹우단이라 불린다. 그렇다면 ‘녹우(綠雨)’란 무슨 뜻일까. 녹우단이 들어선 뒷산의 비자나무숲이 바람에 흔들리면 마치 비가 내리는 소리를 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란다.
녹우당으로 드는 입구의 500년 된 은행나무의 잎은 벌써부터 노란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솟을대문을 삐꺽 열고 들어선 녹우당은 가을볕을 받아 환하게 빛났다. 녹우당은 효종이 윤선도에게 하사해 수원에 지었던 것인데, 윤선도가 82세 되던 해에 집을 뜯어 배에 싣고 이곳으로 옮겼다고 전해진다. 녹우당은 특이하게도 서쪽을 향해 앉아 있다. 건물 바깥쪽의 긴 지붕의 회랑도 오후의 따가운 볕이 툇마루까지 드는 것을 막기 위해 달아놓은 것이다.
녹우당 마당의 잔디밭 위에는 ‘기(氣)가 나오는 자리’라는 팻말이 서 있다. 그러나 기를 받고자 한다면, 그곳보다는 녹우단 뒤편의 비자림에 들어야 할 듯싶다. 녹우단 뒤편 비자나무숲은 탄성이 터질 정도로 초록빛이 빽빽하다. 해남 윤씨의 선조가 “뒷산의 바위가 드러나면 마을이 가난해진다”고 해서 후손들이 정성으로 숲을 가꾼 탓이다. 점입가경. 비자나무숲은 깊이 들수록 더 짙어진다. 바람이 나무 사이로 불면 ‘녹우’라는 이름답게 빗소리가 들릴 듯하다. 비자나무 숲길에서 만난 한 중년 부부는 들뜬 표정으로 “녹우단을 찾았다가 이 숲에 들지 않고 발길을 돌리려거든, 차라리 안 오느니만 못하겠다”고 했다. 그 숲길에 발을 들여보았다면 누구든 동감을 표시했으리라.
윤두서 고택을 찾아 조선시대쯤으로 되돌아가다
해남에는 고산 윤선도의 증손자인 공재 윤두서의 고택도 있다. 조선 후기의 선비화가로 시와 글·그림에 두루 능했던 그는 학문과 사상은 조선 후기 실학사상의 뿌리를 내린 것으로 평가되는데, 윤두서가 남긴 자화상에서 들여다볼 수 있는 사실주의 화풍에서도 그 정신이 또렷이 드러난다. 녹우단이 보관하고 있다는 자화상 속의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의 윤두서의 모습은 보는 이들을 압도하고도 남음이 있다.
윤두서의 고택은 해남군 현산면 백포마을에 있다. 백포마을은 오래된 한옥들이 처마를 맞대고 있고, 최근에 보수한 돌담들도 운치 있게 이어져 있었다. 한때 48칸짜리였다던 고택은 이제 안채 13칸과 곳간채 3칸, 사당, 헛간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남아 있는 고택의 규모는 크거나 웅장한 느낌은 아니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기품이 흘렀다. 아무도 살지 않는 탓인지 집은 쇠락했으나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조선시대쯤으로 되돌아간 것 같은 느낌이다. 고택도 고택이지만, 차분하면서도 고즈넉한 마을의 느낌만으로도 이곳을 찾은 보람이 있었다.
사실 구태여 윤두서의 고택을 물어물어 찾아간 까닭은, 미황사의 처사로부터 명부전의 10대 시왕 조각이 “공재 윤두서의 솜씨”라는 말을 듣고서였다. 아들이 없던 윤두서는 절 근처의 은행나무를 베어다가 미황사 명부전에 10대 시왕을 조성하고 신기하게도 10명의 아들을 보았다고 전해진다. 더욱 신기한 일은 10대 시왕 중 네 번째 시왕의 눈의 크기가 실수로 다르게 조각됐는데, 윤두서의 넷째아들도 눈의 크기가 달랐다던가.
해남 땅에 넘쳐나는 이야기와 볼 것들
해남에 들어설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해남에서는 지도를 펴들면 도무지 어디로 가야 할지 마음을 정할 수 없다. 곳곳에서 이야기로 가득한 명소들이 유혹하는 탓이다. 케이블카를 타고 두륜산에 올라 서북쪽으로는 남도의 이름난 산들이 죄다 발아래다.
두륜산 자락의 대흥사는 또 어떤가. 대흥사 숲길을 걸어 들어가 유선여관에 여장을 내려놓고 옛 여관의 고즈넉한 저녁을 즐겨도 좋겠고, 곧바로 대흥사 부도전에서 아름다운 꽃 문양과 원숭이 문양의 부도를 들여다봐도 좋겠다. 대흥사 산문에 들어 대웅보전에 걸린 당대의 명필로 꼽혔던 원교 이광사의 글씨며 추사 김정희, 그리고 안평대군의 현판 글씨를 하나하나 짚어가며 비교해보거나, 내친김에 일지암까지 올라 초의선사가 차를 달일 때 썼다던 돌확도 어루만져 보면 어떨까.
언제 가 봐도 가슴이 뜨거워지는 땅끝이야 해남 땅에서는 필수코스겠고, 고산 윤선도의 자취를 따라 땅끝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노화도를 딛고 완도의 보길도로 건너가 부용동 정원을 돌아보며 “지국총 지국총 어사화……”로 이어지는 윤선도의 ‘어부사시사’를 읊어보거나, 예송리 갯돌들이 도르르 구르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보면 어떨까.
여기다가 화원반도 서쪽 끝에 등불을 켠 목포구(木浦口)등대는 이름 그대로 목포의 입구에 우뚝 서서 화물선이며 어선들이 드나드는 해협을 100년째 밝히고 있다. 이뿐이랴 우항리의 공룡화석지에서는 풍화되지 않은 지층에서 찾아낸, 이 땅에서 가장 선명한 수억 년 전의 공룡발자국도 볼 수 있다. 해남 땅은 멀지만, 이렇듯 도처에 명소고, 도처에 묵은 이야기들이 있다. 해남 땅에서 만나는 풍경은 죄다 크고, 깊고, 또 유장한 맛이 넘친다. 소리로 치자면 가야금이나 징소리에 가깝다. 절집의 현판, 바다의 물굽이, 고택의 고즈넉한 풍경에도 다 깊은 이야기가 스며 있다. 그 이야기들은, 신발에 묵직하게 달라붙는 남도 땅의 붉은 황토처럼 돌아오는 길에도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Tip
해남 가는 길
땅끝이란 이름답게 해남은 멀다. 서해안고속도로로 종점인 목포까지 가서 다시 영암방조제를 지나 806번 지방도로를 따라가면 해남이다. 목포에서 아예 2번국도로 강진 방향으로 향하다가 13번 국도로 갈아타고 가는 방법도 있다. 목포에서 해남까지는 50분 안팎이 소요된다. 해남은 땅이 워낙 넓은데다 명소들 간의 거리도 멀다. 예컨대 미황사에서 땅끝마을까지 거리가 40km에 이르고, 울돌목까지는 63km에 달한다. 동선을 잘 짜서 움직여야 시간낭비가 없다. 이동시간도 넉넉히 계산해야 한다.
어디서 묵고 무엇을 맛볼까
땅끝마을 일대에 모텔급 숙소들이 즐비하다. 호텔과 콘도도 있지만 대부분 시설이 낡은 편이라 이름값을 못한다. 최근에 지어진 땅끝마을하얀집(061-534-3223)이 깔끔한 편이다. 해남읍에도 해남관광호텔(061-533-1222)이 있다. 대흥사 쪽이라면 한옥여관으로 유명세를 타고 있는 유선여관(061-534-3692)이 추천할 만하다. 해남을 방문한 여행자들이 순례지처럼 들르는 곳이 읍내의 ‘천일식당(061-535-1001)’이다. 떡갈비와 한정식을 내놓는다. 명성은 예전만 못하지만, 그래도 떡갈비 하나는 최고로 치는 곳이다. 땅끝마을의 ‘땅끝바다회집(061-534-6642)’은 전복이 곁들여진 생선회를 내놓는데 음식이 깔끔하다. 목포를 거쳐서 해남으로 든다면 목포의 청자식당에 들러 끝물인 민어회 맛을 봐도 좋겠다. 한때 민어회라면 ‘영란식당’을 최고로 쳤지만, 이즈음 현지인들은 ‘청자식당’의 민어를 더 쳐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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